‘수습’과 ‘해소’

1. “옷을 많이 사서 환경이 얼마나 파괴되는지 아세요?” “그래도 옷은 사야죠.” “그럼 환경은요?” “그 문제는 또 그것대로 해결하려고 해야죠.” 어디선가 지겹도록 들어본 대화였다. 그런데 그 진부한 대화가 긴 시간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 아마 아직 답하지 못한 문제가 내 마음에 걸려 있었기 때문이었을 테다. 철학을 직업으로 삼는 이상, 답하지 못해 마음에 걸린 문제를 너무 오래 방치해두어서는 […]

살아왔던 대로 죽는다.

1. ‘사랑의 판타지’가 있다. 키스할 때 종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연인과 함께 하는 모든 일상이 아름다운 영화 속 어느 한 장면이 될 것이라는 상상. 백마 탄 왕자가 나타나는 것처럼, 운명 같은 사랑이 나타나서 우울하고 불행했던 자신의 삶이 송두리째 변하게 될 것이라는 믿음. 이는 모두 ‘사랑의 판타지’일 뿐이다. 진짜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다. 진짜 사랑은 무엇인가? 키스할 […]

사랑은 노력인가? 아닌가?

1. 사랑은 노력인가? 사랑은 불가항력적 사건이다. 한 존재에게 매혹되어 빠져들게 되는 게 바로 사랑 아닌가? 그러니 사랑은 노력이 아니다. 한 존재를 사랑하려는 마음 자체는 결코 노력으로 만들 수 없다. 이것이 사랑 없는(혹은 아닌) 이와 ‘사랑의 관계’를 시작하려는 노력은 필연적으로 불행으로 가닿게 되는 이유다. ‘거래의 관계’를 ‘사랑의 관계’로 미화하는 역겨운 일은, 오직 ‘사랑은 노력’이라는 믿음 아래서만 […]

자기모욕

“그걸 사랑하는 건 아니야. 그냥 실수였어. 내가 사랑하는 건 너야.” “너에게 상처줄 생각은 없었어. 그냥 파트너였어. 내겐 네가 가장 소중해.” 사랑은 위험하다. 아니 사랑한다는 믿음이 위험하다. 사랑한다고 믿을 때 매번 자기모욕의 시험대에 오르기 때문이다. ‘너’를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믿는 이들은 흔하다. 대부분의 그런 믿음은 본인을 아름답게 채색하려는 기만적인 화장일 뿐이다. ‘너’를 사랑한다고 믿으며, 온통 ‘나’만 보고 […]

확증

프로 시합을 뛴지 10년이 다 되어 간다. 그 사이에도 쉬지 않고 늘 복싱을 했다. 예전에 보이지 않던 움직임들이 보였고, 예전에 할 수 없었던 동작들이 가능해졌다. 가끔 체육관을 찾아오는 프로 준비생들과 하는 스파링에서는 긴장감을 느낄 수 없었고, 체육관에서 관원들과 하는 스파링은 지루하게만 느껴졌다. 10년 전보다 실력이 늘었다는 것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나에게는 오래된 복싱 친구가 있다. […]

한계를 두지 않는 삶

한계를 두지 않는 삶을 살고 싶었다. “이것은 할 수 있는 일이고, 이것은 할 수 없는 일이야.” “이것은 가능한 일이고,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야.” 이런 한계를 두는 일들이 싫었다. 그래서 한계를 두지 않고 살고 싶었다. 마흔이 훌쩍 넘어서야 안다. 그것이 얼마나 치기 어린 낭만이었는지. 한때 한계를 두지 않고 살고 싶었던 속내는 주어진 ‘내 삶의 조건’을 초월하고 싶은 […]

[철학자의 편지] 즉흥

즉흥은 자유다. 네가 즉흥적인 것들에 끌리는 이유는 자유에 끌리기 때문이다. 너는 항상 자유로움을 꿈꿔왔지. 그것이 네가 음악(예술)에 끌리는 이유일 거다. 모든 예술(음악·회화·행위·문학…)의 마지막 단계는 즉흥이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작곡(연주)하고, 그리고 싶은 대로 그리고, 움직이고 싶은 대로 움직이고, 쓰고 싶은 대로 쓰는 것. 그 모든 일들을 아무런 준비나 계획 없이 즉흥적으로 해내는 것이 예술의 궁극이다. 예술의 […]

궁극의 자기집착

한 여자와 한 남자가 있다. 여자도 남자를 좋아했고, 남자도 여자를 좋아했다. 그 둘의 마음은 같은 것이었을까? 마음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여자는 남자를 좋아했기에 온 마음으로 ‘너’를 담았다. 여자는 자신의 생일 선물을 고심해야 했다. 남자보다 자신의 생일이 중요했기 때문이 아니다. 남자는 늘 돈 걱정을 하지만 동시에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음 같아선 자신의 […]

말할 수도, 말하지 않을 수도 없는 것 사이에서

지독히도 아버지를 미워하는 이들이 있었다. 지독히도 돈을 벌고 싶어 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에게 말해주었다. “그렇게 살다가 나중에 후회한다.” 어떤 이는 나의 말에 콧방귀를 뀌었다. “네가 내 인생에 대해서 뭘 알아?” 다행이었다. 적어도 자신의 미움과 탐욕이 더 커지진 않았으니까. 어떤 이는 나의 말에 화를 내었다. “지금 내가 잘못했다는 거야?” 후회되었다. 나의 말이 자신의 미움과 탐욕을 더 […]

[철학자의 편지] ‘너’를 잃은 ‘너’에게

이제 사랑을 안다고 자신하던 어느 날이었다. 그저 하나의 사랑이 끝났으니 조금 쉬었다가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이전의 이별들 역시 힘들었다. 하지만 그녀와의 이별의 고통은 전혀 다른 층위의 고통이었다. 이전 이별들의 고통은 홀로 남겨진 외로움, 공허함, 회한과 같은 고통이었다. 하지만 그녀와의 이별의 고통은 전혀 달랐다. 늘 톨비를 까먹는 나를 위해 차 안에 지폐와 동전을 채워둔 […]

총선에 부쳐

“억울함을 견디는 만큼 위대해진다.” 바야흐로, 총선의 계절이다. 늘 그랬듯이 이 계절은 온갖 파열음들이 쏟아지는 계절이다. 저마다 억울한 사람들이 넘쳐난다. ‘우리’를 대변하기 위해 권력을 쥐려 한다고 하는 정치인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 역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한다. 정치인도 사람이니 저마다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닌 걸까? 그렇지 않다. 억울함을 호소하며 너무 쉽게 대의를 저버리는 이들은 정치인으로서 […]

진리의 언어화, 대의의 생계화

‘철학’은 무엇인가? ‘진리’와 ‘언어’ 사이의 틈을 메워가는 일이다. 진리와 언어 사이에는 늘 좁힐 수 없는 틈이 있다. ‘진리’는 ‘말할 수 없는 것’이고 ‘언어’는 ‘말’이기 때문이다. ‘철학’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해야 하는 일이다. 사랑이 무엇인가? 이 사랑의 진리는 결코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철학’은 이 ‘말할 수 없는 것'(사랑)을 끝끝내 ‘말'(언어화)하려는 일련의 지난한 과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