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있지만 아무도 이야기하지 못한
‘피해의식’에 대한 가장 따뜻하고 농밀한 해설서
이 책은 과감하게 현대 사회의 금기어인 피해의식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 우선 저자는 피해의식을 그저 불쾌하고 부정적인 감정으로 치부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지적하며, 피해의식은 상처받은 마음의 자연스러운 자기방어 반응임을 강조한다. 이러한 재해석을 바탕으로 철학적 사유와 정신분석학적 접근을 통해 그 어디에서도 제대로 다뤄지지 않았던 피해의식의 발생 원리를 심도 있게 파헤친다. 저자는 ‘기억’과 ‘무의식’이라는 두 가지 개념으로 피해의식이라는 모호하고 뒤엉킨 마음을 명료하게 볼 수 있게 해주는 이론적 토대를 마련해준다.
또한 저자는 철학자이자 인문주의자로서 오랜 시간 상처받은 이들과 부대끼며 살아온 경험을 바탕으로, 한 사람의 상처받은 기억이 어떻게 피해의식이 되고, 그 피해의식은 일상에서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는지 매우 사실적이고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한 사람에 대한 단편영화 같은 그 이야기들을 따라가다 보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나’와 ‘너’의 행동이 혹시 피해의식 때문은 아니었을지, 그 피해의식이 생길 수밖에 없었던 ‘나’와 ‘너’의 상처는 무엇이었을지 끊임없이 고민하게 될 것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나’의 상처에 대한 이해와 ‘나와 다른 상처를 지닌 이’들에 대한 감수성을 전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저자의 논의는 개인적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저자는 한 개인의 피해의식의 발생에 사회적 문제가 깊숙이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나아가 권력과 일부 언론이 자신의 체제 유지 및 강화를 위해 대중들의 피해의식을 조장하고 확대 재생산하고 있는 현실을 폭로한다. 사회가 피해의식에 휩싸인 개인들을 양산하고 그 개인들이 모여 다시 집단을 이룰 때, 우리 사회에는 아귀다툼과 같은 갈등과 마찰, 분열이 끊이지 않을 수밖에 없다. 저자는 빈부 갈등, 세대 갈등, 젠더 갈등 등 우리 시대의 많은 사회적 갈등의 근본에는 피해의식이 도사리고 있다고 말하며, 피해의식은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비화될 잠재적 요소라고 경고한다. 그리고 ‘나’와 ‘너’의 피해의식 뿐만 아니라, ‘우리’의 피해의식을 극복할 현실적 방안 역시 제시한다.
“글을 읽는 데 멈춰지게 되는 순간이 많아서 한 번 읽는 데 오래 걸리네요.” 이 책의 전신인 브런치스토리 연재에 달렸던 한 독자의 댓글이다. 이 책은 결코 단숨에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나의 피해의식, 또 가족·연인·친구 등 소중한 이들의 피해의식이 떠올라 마음이 답답해지고 머리가 복잡해져 하루에 몇 장 읽기 어려운 책이다. ‘나’의 상처든 ‘너’의 상처든 ‘우리’의 상처든, ‘상처받은 마음’을 제대로 들여다보는 일은 매우 어렵고 힘든 일이다. 하지만 저자는 “상처받은 기억을 잘 치유하는 것이 행복이고, 그렇지 못하는 것이 불행”이라고 말하며,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그 어렵고 힘든 일을 우회할 수 없다고 말한다. 세상에 상처받지 않는 삶은 없다. 누구에게나 아물지 못한 상처는 있고, 앞으로 받게 될 상처도 있을 것이다. 그 상처 때문에 피해의식에 휩싸여 ‘나’, ‘너’, ‘우리’ 모두가 불행해지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올 것이다. 그때 이 책이 그 ‘상처받은 마음’의 길잡이가 되어주었으면 한다. ‘상처받은 이들을 위한 바이블.’ 언젠가 이 책이 그렇게 불릴 수 있길 기대해본다.
목차
머리말
프롤로그
1부. ‘나’를 보호하고 싶은 마음, 피해의식
1. 사회적 금기어, 피해의식
2. 피해의식은 나쁜 것일까?
3. 피해의식은 과도한 자기방어다
4. 피해의식의 여섯 가지 얼굴
5. 자기방어의 도구 : 두려움, 분노, 열등감, 무기력
6. 자기방어의 결과 : 억울함, 우울함
7. 피해의식이라는 주사위
철학자가 본 피해의식 : 스피노자
2부. 피해의식, 사실과 상상의 소용돌이
1. 피해의식이 없는 이는 없다
2. 피해의식은 ‘기억’이고 피해자 의식은 ‘사실’이다
3. 피해의식의 과잉해석과 과소해석
4. 피해의식은 ‘기쁜 슬픔’, 피해자 의식은 ‘슬픈 기쁨’이다
5. 피해의식에 대한 그릇된 진단
6. 피해의식, 상상의 기억화
7. 세 가지 기억, 세 가지 피해의식
8. 나의 피해의식은 어느 정도일까?
철학자가 본 피해의식 : 베르그손
3부. 무의식이란 어둠, 피해의식
1. 피해의식은 무의식적이다
2. 피해의식은 왜 강렬한가?
3. 근본적 피해의식, ‘부모’와 ‘성’
4. 피해‘의식’, 피해‘무의식’, 피해‘전의식’
5. 피해‘전의식’을 확장하라
6. 강박증적 피해의식, 히스테리적 피해의식
7. 신경증적 피해의식 너머
철학자가 본 피해의식 : 라캉
4부. 권력과 금기의 지옥도, 피해의식
1. 피해의식은 사랑받지 못한 상처다
2. 피해의식과 자존감
3. 피해의식의 근본 원인, 기쁨의 독점
4. ‘권력-욕망-금지-의무’의 사면체
5. 피해의식의 촉매제, 자의식 과잉
6. 부채감이라는 폭력
7. 피해의식, 못나서 못되지는 마음
철학자가 본 피해의식 : 에피쿠로스
5부. 피해의식은 어떻게 우리를 파괴하는가?
1. 당위와 현실을 혼동하는 이유
2. 고통을 과장하고 싶은 욕망
3. 소중한 것을 소중히 대하지 못하는 이유
4. 자기연민은 어디서 오는가?
5. 소망의 부정, 부정의 소망
6. 대화의 단절, 관계의 단절
7. 피해의식의 전이
8. 피해의식은 냉소주의를 낳는다
철학자가 본 피해의식 : 비트겐슈타인
6부. 피해의식이라는 거대한 감옥
1. 언제 피해의식은 사회적 문제가 되는가?
2. ‘슬픔의 공동체’의 원인, 피해의식
3. 피해의식은 바이러스다
4. ‘갑질’은 왜 발생하는가?
5. 절대적 피해자와 절대적 가해자
6. 절대적 가해자도, 절대적 피해자도 없다
7. 피해의식과 언론
8. 피해의식과 파시즘
철학자가 본 피해의식 : 악셀 호네트
7부. ‘나’와 ‘너’의 피해의식 너머
1. 약함을 긍정하지 말라
2. 주인공의 시선, 비평가의 시선
3. 평균의 힘
4. 사랑, 자기 객관화에 이르는 길
5. 기억 너머 새로운 기억으로
6. 욕망의 해소, 금기의 직면
철학자가 본 피해의식 : 질 들뢰즈
8부. ‘우리’의 피해의식 너머
1. 혼자 사는 것이 아니기에 제멋대로 살아야 한다
2. 피해의식으로 연대하기
3. 예민함 너머 섬세함으로
4. 사랑하거나 싸우거나
5. 한계 너머 문턱으로
6. 피해의식은 아비투스다
7. 내겐 너무 아름다운 그녀
에필로그
책 속으로
피해의식은 한 사람의 마음에 남은 상흔일 뿐이다. 깊은 상처가 반복되어서 오래도록 아물지 못한 피딱지 같은 상흔. 한 사람의 상흔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상흔을 흉터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깊은 상처로 인해 피부를 꿰맨 상흔을 보며 흉하다고 인상만 찌푸리는 것은 얼마나 참담한 일인가?
왜 세상 사람들은 피해의식을 부정적으로 보고 비난하는가? 피해의식을 흉한 흉터로만 치부하기 때문이다. 누군가 한 사람의 피해의식을 비난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은, 그가 얼마나 타인의 고통에 둔감한지를 드러내는 일이다. “그건 네 피해의식이지.” 이는 우리 사회가 얼마나 상처받은 이들에 대한 감수성이 빈약한지를 보여주는 절망적인 일이다.
‘나’의 상흔이건 ‘너’의 상흔이건, 그 앞에 섰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상흔(피해의식)이 생길 수밖에 없었던 상처(고통)를 먼저 보아주어야 한다. 겁이 많은 아이는 다그치지 말고 먼저 따뜻하게 안아주어야 하는 것처럼, 피해의식이 있는 이들에게도 마찬가지다. 피해의식에 대해 차갑게 가치 평가하기 전에 먼저 상처받은 마음을 살펴주어야 한다. “너는 이런 상처로 인해 피해의식이 생기게 되었구나.” 이것이 피해의식을 다루는 첫 번째 작업이다.
— 「피해의식은 나쁜 것일까?」에서
피해의식은 인간의 보편적인 마음 상태다. 피해의식은 누구에게나 있고, 어느 순간에나 찾아올 수 있다. 피해의식을 다룰 때 이 사실을 분명히 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피해의식에 잠식되는 일은 자신에게는 결코 피해의식이 있을 리 없다는 착각으로부터 시작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피해의식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자신의 피해의식을 들여다 볼 수 있는 틈이 생긴다.
— 「피해의식이 없는 이는 없다」에서
세상 사람들은 상처와 고통이 크면 클수록 마치 그것이 원래 없었던 것처럼 성급하게 은폐하고 외면하려 한다. 하지만 그네들의 바람과는 달리 그렇게 은폐된 상처는 짓무르고 곪아서 더 큰 고통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는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상처를 직시해야 한다. 성급하게 덮어 두느라 상처에 눌러 붙은 천 조각을 걷어내야 한다. 그렇게 고통을 감당하며 상처 부위를 벌려 곪지는 않았는지 확인하고 약을 발라주고 햇볕에 쬐어주고 바람도 쐬어주어야 한다. 이것이 상처를 가장 빨리 아물게 하는 방법이다.
(…) 신체의 상처와 마음의 상처는 같다. 신체적 상처가 있을 때, 그것을 있는 그대로 직면하며 고통을 견뎌야 한다. 그 고통이 필요하다. 그 고통을 견디는 시간 속에서 고통은 조금씩 잦아들게 된다. 그때 비로소 자신 옆에 있었던 아름다운 경치로 시선을 돌릴 수 있게 된다. 마음의 상처 역시 그렇다. 정서적 상처가 있을 때, 그것을 있는 그대로 직면하며 그 슬픔을 견뎌야 한다. 그 슬픔이 필요하다. 그 슬픔을 견디는 시간 속에서 그 슬픔은 조금씩 잦아들게 된다. 그렇게 자신 옆에 늘 주어져 있었던 기쁨의 순간들로 시선을 돌릴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불운했던 피해자가 슬픔에서 벗어나 기쁨으로 나아가는 방법이다.
—「피해의식은 ‘기쁜 슬픔’, 피해자 의식은 ‘슬픈 기쁨이다」에서
어린 시절부터 부모에게 깊은 사랑을 받은 이들은 억울한 비난이나 오해(상처)를 받아도 비교적 쉽게 넘길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은 자신을 근거 없이 비난하고 오해하더라도, 부모만은 자신을 온전히 받아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들은 상대적으로 피해의식이 옅을 수밖에 없다. 반면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했거나 혹은 조건부 사랑만 받았던 이들은 억울한 비난과 오해를 쉽게 견뎌내기 어렵다.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존재인 부모마저 자신을 이해해주지 않는다고 믿는 아이는 더 이상 기댈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들의 피해의식은 더 짙어질 수밖에 없다.
—「근본적 피해의식, ‘부모’와 ‘성’」에서
실제적이든 상상적이든, 자신에게 무언가 결핍되었다고 여기는 이들은 그 결핍된 것(돈ㆍ학벌ㆍ명예ㆍ외모…)을 과도하게 욕망하게 되고, 바로 그 욕망이 피해의식을 발생시킨다. 어떤 종류의 피해의식이든, 그 피해의식은 욕망으로부터 온다. 결핍된 것(돈ㆍ명예ㆍ외모…)을 채우고 싶은 욕망. 그 욕망이 비대하면 비대할수록 그에 대한 피해의식 역시 강하다.
—「신경증적 피해의식 너머」에서
외모에 대한 피해의식은 왜 발생했을까? 외모가 아름다운 이가 기쁨(인정ㆍ칭찬ㆍ관심)을 독점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외모는 일종의 권력이다. 그 권력으로 ‘기쁨의 독점’이 일어나고, 그 반작용으로 인해 받은 상처(폄하ㆍ비난ㆍ무관심) 때문에 외모에 대한 피해의식이 생기게 된다. 예쁜 아이가 예쁘다는 이유로 온갖 인정ㆍ칭찬ㆍ관심을 독점할 때, 못생긴 아이는 폄하ㆍ비난ㆍ무관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 상처를 받고 자란 아이가 어떻게 피해의식이 생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돈ㆍ학벌ㆍ명성ㆍ젠더 등등 모든 피해의식은 그렇게 발생한다. 돈ㆍ학벌ㆍ명성ㆍ남성(혹은 여성)은 권력이다. 그 권력으로 돈이 많은, 학벌이 좋은, 유명한, 남성(혹은 여성)인 누군가가 기쁨을 독점할 때, 그 반작용으로 인한 상처(폄하ㆍ비난ㆍ무관심) 때문에 저마다의 피해의식이 발생하게 된다. 즉, 마음이 뒤틀어져서 피해의식이 생긴 게 아니라, (일부 계층이 기쁨을 독점한 결과로 발생한) 피해의식 때문에 마음이 뒤틀어지는 것이다. 기쁨의 독점! 이것이 피해의식의 근본적인 원인이다.
—「피해의식의 근본 원인, 기쁨의 독점」에서
행복과 불행은 상처받은 기억과 뗄 수 없는 상관관계에 있다 상처받은 기억을 잘 치유하는 것이 행복이고, 그렇지 못하는 것이 불행이다.
—「고통을 과장하고 싶은 욕망」에서
피해의식에 휩싸인 이들을 생각해보라. 그들은 자신이 받은 고통을 과장하고 확대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 쉽게 말해, 그들은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큰 상처를 받은 이라고 여긴다. 자신이 가장 상처받았다고 믿는 이들은 언제나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가장 소중히 대해주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들의 마음속에서는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런 과장된 자기연민에 휩싸인 이가 어떻게 자신 곁에 있는 소중한 것들의 소중함을 제대로 볼 수 있겠는가?
—「소중한 것을 소중히 대하지 못하는 이유」에서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저마다의 상처가 있다. 어떤 이는 아름다운 외모가 아니어서, 또 어떤 이는 좋은 대학을 나오지 못해서, 또 어떤 이는 가난해서 상처를 입었다. 그 상처가 피해의식이 될 때, 그들은 너무 쉽게 자신을 절대적 피해자의 자리에 위치시킨다. 이처럼 만연한 피해의식은 만연한 절대적 피해자를 양산한다. 모두가 절대적 피해자가 된 세상을 상상해보라. 모두가 자기 상처와 고통에 매몰되어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불쌍하고 안쓰러운 존재라고 믿는 세상을 상상해보라. 그 세상은 어떤 세상이겠는가? 자신보다 더 상처받고 고통받은 이들에게 무관심하거나 냉소적이거나 폭력적인 세상일 수밖에 없다. 그렇게 모두들 자신의 이기적인 삶을 정당화하는 세상일 수밖에 없다. 피해의식은 개인적인 삶만 불행으로 몰아넣지 않는다. 피해의식이 만연해질수록 공동체적 불행 역시 만연해질 수밖에 없다.
—「절대적 피해자도, 절대적 가해자도 없다」에서
피해의식은 언제 옅어지는가? 타인의 상처와 고통을 진정으로 마주할 때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피해의식에 휩싸인 이들에게 쉽게 말한다. “타인의 상처와 고통을 이해하라!” 이보다 무지하고 순진한 이야기가 또 어디 있을까? ‘나를 향한 주관성, 너를 향한 객관성’이라는 보편적 조건 안에서 타인의 상처와 고통을 이해하는 일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이 인간 내면의 보편적 조건을 몰랐다면 무지한 것이고, 이 보편적 조건을 무시하려 했다면 순진한 것이다. 타인의 상처와 고통을 이해하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이었다면, 세상의 피해의식은 이미 모두 사라졌을 테다.
우리는 언제 타인의 상처와 고통을 진정으로 마주하게 되는가? 사랑할 때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할 때만 인간의 보편적 조건을 뒤집을 수 있다. ‘나를 향한 객관성, 너를 향한 주관성’. 바로 이 뒤집힌 조건 속에서만 우리는 타인의 상처와 고통을 진정으로 마주하게 된다. 이것이 사랑이 피해의식을 무력화시키는 작동 원리다. 타인의 상처와 고통을 이해하려 하지 말라. 그저 한 사람을 사랑하라. 그때 우리는 인간의 보편적 조건 너머 자기 객관화에 이르고, 비로소 피해의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 「사랑, 자기 객관화에 이르는 길」에서
우리 사회는 어떻게 피해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우리에게 저주처럼 들러붙은 피해의식을 부정하려 하기보다 있는 그대로 긍정해야 한다. 그렇게 ‘나’의 피해의식 너머 ‘너’의 피해의식을 볼 수 있으면 된다. 이를 통해 이질의 피해의식을 대해서 이해하고 교감하고 공감할 수 있다면, 우리 사회는 피해의식이라는 늪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다.
피해의식에서 벗어난 사회는 어떤 사회인가? 노동조합원들이 여성 운동을 함께하는 사회, 페미니스트들이 성소수자들의 권익을 위해 함께 싸워주는 사회, 성소수자들이 장애인 인권을 위해 함께 싸워주는 사회다. 더 나아가 페미니스트들과 성소수자들과 장애인들이 노동조합원들과 함께 자본주의에 맞설 수 있는 사회다. 이렇게 ‘나’의 피해의식 너머 ‘너’의 피해의식마저 껴안아 연대하는 사회는 얼마나 아름다운 사회인가? 모든 피해의식이 함께 연대해서 피해의식을 넘어서는 사회는 얼마나 아름다운 사회인가?
— 「피해의식으로 연대하기」에서
불편한 삶의 진실이 있다. 피해자는 선하지 않다는 것이다. 정확히는 피해의식을 갖게 된 피해자는 선하지 않다. 피해의식은 광기 어린 폭력성을 띤다. 왜 그런가? 피해의식은 언제나 비합리적 보상 심리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일부 유대인들(시오니스트)은 ‘피해자’라는 이름의 ‘가해자’가 되었다. 그들은 어떻게 가해자가 되었을까? 이유는 하나다. 바로 자신이 피해자였기 때문이다. 그들의 가해는 자신이 엄청난 피해자이니, 자신이 행하는 어떤 폭력도 괜찮다는 무의식적 정당화의 결과다. 이것이 바로 피해의식의 비합리적 보상 심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유대인들의 상처는 나치들에 의한 것이다. 이것이 합리적 사고다. 하지만 피해의식에 휩싸인 시오니스트들은 이런 합리적인 사고를 할 수 없다. 그들은 팔레스타인을 상대로 비합리적 보상 심리를 충족하고 있을 뿐이다.
— 「사랑하거나 싸우거나」에서
아비투스도, 피해의식도 우리에게 영원히 들러붙은 저주가 아니다. 피해의식은 습관(아비투스)일 뿐이다. 물론 그것은 아주 강고한 습관이지만, 영원히 바꿀 수 없는 습관은 아니다. 어떤 습관도 ‘구조화된 구조’인 동시에 ‘구조화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오랜 시간 우리를 지배해온 ‘습관’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지 답할 수 있다. 매혹적인 마주침과 고통을 견디는 실천을 통해서다. 피해의식에서 벗어나고 싶은가? 가장 먼저, 매혹적인 마주침을 찾아 떠나야 한다. 매혹적인 마주침을 만났다면, 고통을 견디며 새로운 습관을 위한 실천을 해나가야 한다. 그럴 수 있을 때, 우리의 오래 습관인 피해의식과 결별할 수 있다.
— 「피해의식은 아비투스다」에서
길원옥 할머니는 위안부 피해자이다. 그녀보다 더 큰 상처를 받은 사람이 또 있을까? 그녀는 군국주의 망령에 사로잡힌 일본에 의해 참혹한 일들을 온몸으로 겪어냈다. 하지만 그녀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일본인들이 고통받고 있을 때, 자신의 고통은 잠시 잊고 일본인들의 아픔을 진심으로 걱정해주었다. 심지어 자신이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기꺼이 일본을 돕고 싶다고 전했다. 이것이 바로 피해의식 너머의 삶이다. 이는 얼마나 귀하며 드문 삶인가?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은 언제나 귀하며 드문 법이다. 내게 그녀는 너무 아름다운 사람이다.
길원옥 할머니는 어떻게 피해의식을 벗어났을까? 길원옥 할머니의 상처는 아물지 않는다. 그 크고 깊은 상처가 그리 쉬이 아물 리 없다. 하지만 그녀는 피해의식에 잠식당하지 않았다. 그녀는 지혜롭기 때문이다. 지혜는 무엇인가? ‘나’의 상처를 돌보며, ‘너’의 상처마저 돌보는 일이다. 그렇게 ‘우리’의 상처를 모두 치유하는 일이다. 그것이 지혜다. 만약 길원옥 할머니가 지혜롭지 않았다면, ‘나’의 상처에만 매여 일본의 참사에 은근히 통쾌해하거나 쾌재를 불렀을지도 모를 일이다. 피해의식에 휩싸인 흔한 이들처럼 말이다.
그녀는 지혜롭다. 이것이 그녀가 ‘나’의 고통은 ‘나’의 고통대로 치유해가고, ‘너’의 고통에 대해서는 함께 아파해주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이유다. 그녀는 온 힘을 다해 일본 정부에 진심 어린 사죄를 요구한다. 이는 ‘나’의 고통은 그것대로 치유해가는 과정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는 ‘너’의 고통에 함께 아파하고 ‘너’를 배려한다. 심지어 그 ‘너’가 ‘나’의 고통에 깊게 관계된 ‘너(일본)’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녀는 그렇게 ‘우리’ 모두 고통을 치유해주고 있다. 이보다 더 아름다운 이가 또 있을까?
— 「내겐 너무 아름다운 그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