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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HOME - 칼럼 - 확증

확증

  • 2024년 05월 18일
  • 황진규
  • 29

프로 시합을 뛴지 10년이 다 되어 간다. 그 사이에도 쉬지 않고 늘 복싱을 했다. 예전에 보이지 않던 움직임들이 보였고, 예전에 할 수 없었던 동작들이 가능해졌다. 가끔 체육관을 찾아오는 프로 준비생들과 하는 스파링에서는 긴장감을 느낄 수 없었고, 체육관에서 관원들과 하는 스파링은 지루하게만 느껴졌다. 10년 전보다 실력이 늘었다는 것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나에게는 오래된 복싱 친구가 있다. 나와 15살 차이 나는 그는 한국에서 챔피언을 하고 캐나다로 건너가 프로 선수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캐나다에서도 연전연승을 하고 있다. 그 친구가 한국 챔피언이던 시절, 그와 스파링을 할 때면 늘 일방적으로 얻어터지기 일쑤였다. 어느 날, 그와 스파링을 하다 갈비뼈가 골절된 이후로 그 친구와 하는 스파링은 항상 긴장과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잠시 한국에 들어왔단다. 같이 운동을 하자고 했다. 스파링 약속을 정하고 난 뒤 잊고 있었던 감정이 찾아왔다. 약간의 긴장, 설렘, 두려움이 뒤섞은 감정이었다.

스파링이 시작되었고 시작과 동시에 힘을 실은 펀치를 두세 개 날렸다. 나이 많은 선배에 대한 예를 넣어두라는 신호였으며,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네가 쓰러질 수 있다는 신호였다. 현역 선수답게 펀치의 의미를 알아챘고, 그 역시 프로 선수 특유의 살기로 응답했다. 다섯 개 라운드를 치고받았다. 15분 내내 찌릿찌릿했다. 정말 신났다. 오랜만에 온몸의 세포가 다 살아서 반응하는 기분이었다. 짜릿한 경험이었다.

스파링이 끝나고 그 친구에게 밥 한 끼를 사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졌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묘한 기쁨이 찾아왔다. 익숙한 기쁨이었다. 확증의 기쁨. 나는 분명 알고 있었다. 나의 복싱 실력이 좋아졌다는 사실을.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나의 생각이고 믿음일 뿐이다. 그 생각과 믿음이 진정으로 나의 것이 되려면 확증이 필요하다. 확인되고 증명되지 않은 자신의 생각과 믿음은, 그것이 아무리 확실한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허망한 신기루 같은 것일 수 있다.

“나, 재밌었구나. 정말 스파링을 즐겼구나.” 그와 스파링을 단 한 번도 즐긴 적이 없었다. 늘 긴장됐고, 두려웠다. 하지만 그날 살기 넘치는 주먹들이 오고가는 그 스파링을 진심으로 즐겼다. 그 친구는 더 이상 긴장의 대상도, 두려움의 대상도 아니었다. 나는 그와 스파링을 즐길 수 있을 만큼 복싱을 잘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했고, 또 스스로에게 증명했다. “형님, 다시 복귀하셔야겠는데요.” 스파링이 끝난 뒤 그가 건넨 말이 인사치레가 아니라는 걸 우리는 서로 알고 있다. 링 위에서의 확증은 나에게 또 다른 확증을 주었다.

“나는 여전히 두려움을 두려워하지 않고 나아가고 있구나. 나는 여전히 나 자신이 어디쯤 와있는지를 칼날 위에서 확인하려는 마음을 버리지 않고 있구나.” 나는 알고 있다. 나의 철학, 나의 글, 나의 일상이 조금씩 원숙해져가고 있다는 사실을. 하지만 그 생각과 믿음을 아무런 확증 없이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그것이 아무리 확실해보인다 하더라도 그러고 싶지 않다. 나의 철학, 나의 글, 나의 일상이 허망한 신기루처럼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나의 철학, 나의 글, 나의 일상이 어디쯤 왔는지 매 순간 칼날 위에서 확인하고 증명하는 삶을 살아가고 싶다. 살기 넘치는 주먹이 오고 가는 ‘링’ 위에서 나의 ‘복싱’을 확증한 것처럼, 살기 넘치는 사건들이 오고 가는 ‘삶’ 위에서 나의 ‘철학’과 ‘글’과 ‘일상’을 확증하며 살아가고 싶다. 나는 그렇게 삶을 꽉 쥐며 살아가고 싶다. 죽는 날까지 그렇게 팽팽하게 살다 가고 싶다.

Picture of 황진규

황진규

철학흥신소 추장. 철학을 공부하며, 글을 쓰고, 수업을 하며 산다. 앎과 삶을 연결하려는 인문공동체, '철학흥신소'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가고 있다. 철학과 삶에 대한 주제로 몇 권의 책을 썼고 앞으로도 계속 쓸 것이다.
이메일 | jigyungs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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